[마비노기/아드밀레,랑그밀레,말로밀레]
20150829
1.
어둠 속에서 서로를 탐하는 짐승마냥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달뜬 악몽은 쉬이 가실줄 몰라, 몇번이고 제 거처를 부숴가며 새벽이 되어갈 즈음에 깨곤 했던 것이다.
이른 시간, 깨진 돌조각 하나에 마음을 하나하나 담아가며 더 가느다란 모래로 부순다. 이제 곁에 없는 이의 얼굴이 부서지는 모래를 따라 바람결에 흩어진다.
제발 잊혀지거라. 자신을 타이른다. 이제껏 이보다 아픈 이별은 없었기에, 고통을 덜고자 마음 한구석에 박힌 얼굴을 긁어내려 하는 것이다.
새벽의 바닷바람이 그녀의 한숨이 되어 얼굴에 와닿는 것 같다.
2.
노을지는 바닷가 모래밭을 걷다보면 혹시나 따라오고 있지 않을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파도보다 세차게 부딪히는 저녁, 뒤를 따라오는 이는 없고-
네가 내 뒤에서 달려와 안기길 바란다. 네가 그럴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질없는 바램을 말해본다. 거리를 두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면서, 네가 다가오길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나는 다가갈 수 없는 위치라는 건 핑계에 불과해. 너를 슬프게 하고 나도 상처 입으면서- 이 마음은 내 뱃속 어디서 잉태되고 어떻게 자라 내 입술을 비집고 잎과 줄기를 낸단 말이야. 내게 와닿는 애달픈 네 눈길이 몇 번이고 날 무너지게 하는데도.
꽃을 피워라 마음아.
노을을 닮은 꽃은 쓸쓸하게 고개를 떨구며 줄기를 뻗어서, 너에게 닿게 자라나고 있다.
너와 나를 완전히 얽어서 우리가 될 때까지 자라라.
나는 괴로운 생각을 거두었다.
밤바다의 바람이 차다.
3.
빈틈없이 안아주세요. 내 살갗에 당신의 온기가 아닌 차가운 공기가 와닿는 건 싫거든요.
그러나 빈틈없이 안게 된다면, 너는 내 힘에 부스러지고야 마는데. 그건 싫다.
4.
갑자기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말은, 여태껏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던 말, 그리고 하려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내 안에만 담아두고 묵히고 썩혀도 모자랄 만큼 질척하고도 눈물을 다듬어서 빚어내는 수정만큼 순수한 것이었다.
"사랑해요"라는 그 말이.
당신은 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날 보았다. 그래, 그런 반응이야. 놀라고, 어이없어 하고, 당황스러워 하고, 곤란해 하지.
도망칠 거야ㅡ 당신의 시선이 내게 닿지 않는 곳으로, 내 말이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곳으로.
그럼에도 붙잡아주었음 해, 내 얼굴을 똑바로 봐주었으면 해, 이 질척거리는 속을 헤집었으면 해. 당신의 부드러운 말은 나를 아름다운 꿈으로 이끄니까.
헛된 망상은 그칠 줄을 모르고 몸은 도망치고 마음은 당신 품으로 파고들어.
5.
그대는 정말로 모르느냐, 이 마음들을?
.......제가 정녕 모를거라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전 알아요. 제 눈길은 오롯이 당신에게 머무르며, 다른 것에 그를 두기엔 쓸데없이 올곧다는 것을.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라해도?
당신이 사랑하시니 됐어요.
6.
저는 이 에린이 좋아요. 어디를 가든 아름답고 인상깊은 장소들이 있어요. 맛있는 음식과 공기가 있어요. 웃으면서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말로 당신은 어린 생각이라 제게 말하겠죠. 세상은 빛만큼의 어둠이 있고 행복과 비례하는 슬픔과 고독과 절망이 있다고. 저도 알아요. 아본의 반으로 갈라선 땅이 그 증거인걸요.
그래도, 양면이 있기에 더 다채로운 색이 깃들겠죠. 어둠 없이 빛만 있다면 빛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빛 없이 어둠만 있다면 더이상 어둠이 아니니까요.
7.
네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어-
강하게 묶여있던 인연이여, 죽는 날까지 함께 할거라 믿었다.
고대의 삶과 지식을 가졌어도 나는 그대 앞에서 어렸다. 그대에게 가진 감정 역시 어렸어.
무슨 짓을 해도 전해질 수 없게 될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그렇게 이별은 갑작스럽게, 순식간에 진행되어- 이제 그대와 나 사이의 간극은 저 멀리 다른 세상에.
별들이 무수히 쏟아지던 밤이었다. 유성의 화려한 쇼를 바라보면서, 그대의 눈빛을 떠올렸어.
이제는 볼 수 없는 빛. 어둠 속을 비추던 빛.
8.
-너의 힘을 보고 싶구나! 드래곤은 그리 소리쳤었다. 그 집념에 변화는 없었다. 가면을 쓴 무리가 그토록 떠들어대던 별에서 온 자들의 힘을 그는 알고 싶었다.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호기심과 투기를 구태여 억누를 필요도 없었기에. 기꺼이 맞선다.
호기심은 별들에 대한 시기와 집착, 심지어 동경까지 불러 일으켰다. 순백의 몸뚱아리만큼 순수한 질투에서 번지는 열정은 괴이하게 뒤틀려, 더이상 그것이 아니게 되었을 무렵에는.
과거 어린 드래곤이 동경했던 것- 순백의 설원만큼이나 빛나는 밤하늘의 별, 그 자체로.
드래곤의 마음은 별빛으로 하얗게 그슬린다.
-질리도록 봤어. 너 같은 하찮은 육체에서도 강한 힘이 넘치도록 흘러나오니까 신기해서 계속 보게된단 말이다! 시선을 돌릴 틈도 없이 네 빛에 눈이 멀어버렸다고, 이 멍청한... 멍청한 밀레시안!
9.
-언제까지고 당신의 날개가 영원하길.
에린을 어둠으로 물들이던 저승이 물러나고, 모든 것이 제 빛을 찾고 나서. 에린은 더이상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별의 여행자들은 그들의 가짜육신에서 벗어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지게 되었다.
변덕스러운 여신은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럽게 별의 영혼을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소울스트림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질 밀레시안들로 가득했다. 나오는 그들을 인도하며,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누군가에게 이별의 인사를 할 시간을 주었다.
그녀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레네스에 내려섰다. 이미 몇몇 밀레시안들이 그곳을 거쳐갔는지, 그녀가 만나고 싶어한 이는 모든 것을 안다는 얼굴로 소금기가 가득한 하얀 파도에 발을 담그며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 그대도 이별을 고하러 왔는가?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빛 용은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그녀 앞에 두었다. 늘상 그러했듯, 그녀는 작은 몸 한가득 차도록 용의 머리를 안았다. 오래도록, 그녀가 바라는 만큼.
-아드니엘.
그녀가 레네스에 오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드니엘.
그녀는 용의 이름만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든든한 아군이자, 현명한 친구이며, 말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주는. 안는 것만으로 따뜻하고 편안해. 그녀는 눈을 감았다.
-행복했어요. 에린에서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해줘서 고마워요.
-나 역시 그러했다네. 그대는 늘 이곳에서 나를 기다렸지... 그것이 정말 기뻤는데. 이제는 기억에만 남을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곧 용은 조그맣게 그의 언어를 외웠고, 언어는 꽃이 되어 비처럼 주위에 내렸다. 그녀의 머리에 꽃 하나가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듯이 일그러졌다.
-이제 갈 시간이에요.
인도자가 그녀를 불렀다.
-정말로 이별이군.. 부디 행복하시게.
뒤돌아 가는 그녀에게 용은 그리 말한다. 그녀도 곧 뒤를 돌아서 그를 보았다.
좋아하던 미소가 눈물과 함께 터졌다.
-행복하세요.
그말을 끝으로, 별의 영혼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10.
그의 날개는 지치고 병들어서 더이상의 날개짓은 허락되지 않았다.
날개를 잃은 그는 꿈을 꾼다. 그녀를 태우고 날았던 과거의 어린 자신을, 아름다운 하늘과 사랑스러운 바람을, 그리고 이 세계를 떠나는 그녀가...
사랑했었노라고 말하지도 못했던, 엷게 물든 물감 같았던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던 자신을. 다음에 다시 태어나는 세계에서도 인연이 닿아서 만났으면 하고 바란다.
늙어버린 용은 일족의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11.
....여긴.
안녕, 늙은 친구?
알만하군.
재미없긴. 이거야 원-
.......(한숨)
앞으로는 더 놀라운 일이 생길텐데 좀 기뻐하라고?
내가 무엇에 기뻐하면 되는 거지?
흠, 글쎄에?
낯설지만 어딘지 낯익은 그 인영은 싱글싱글 웃었다. 늙은 머리로는 기억할 수 없는 어딘가에 묻힌 녀석인 모양이다. 그는 허공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꼭 문을 열듯, 그는 허공을 열었다.
"그녀'를 다시 보길 바래."
"잠ㄲ......!"
대꾸할 틈도 없이 녀석은 나를 갈라진 공간으로 떨어뜨렸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그 공간에는 바닥이 없는 모양이다. 1미터씩 떨어질 때마다 머릿속이 비어간다.
12.
빛이 사그라들기 전에, 스스로 어둠에 먹혀 새롭게 태어나는 거야.
그러고서 다시 너를 만났다.
빛이 붙잡지 못했던 것을 어둠이 붙잡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글쎄, 어떨까."
13.
그는 그녀의 입술에 조심스레 제 발톱을 가져다 대었다. 지금만큼은 조용히 해달라는 뜻이리라.
오래도록 계속된 인연이었지, 그렇지 않나?
황금으로 빛나는 드래곤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말할까, 그녀는 듣고 싶었다. 동시에 듣기 싫었다.
그대에게, 나를 고백하겠네.
드래곤의 숨결이 와닿아 그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맥박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아, 안돼요. 아시잖아요. 이것은..
그녀는 거의 애원했다. 더이상 말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왜 그러지?
드래곤의 눈동자가 선연한 붉은빛으로 빛났다. 아프게 금이 가고 갈라지는 눈동자가 그녀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저,저는.... 싫어요....
그녀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꿈이니까, 분명 깨기 싫을테니까, 깨고 나서는 분명.
어떻게 될지 알고 있으니까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은 어둑어둑한 것이, 새벽이 되려면 멀었다. 하늘에 별이 가득해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불을 움켜쥐고 머리 끝까지 둘러쓴다.
바보 같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