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By the sea] 로샨코넬 50일
룽크
2017. 12. 8. 00:22
20151009
가을로 접어드는 기간이라 다른 나라 이곳저곳에서는 싸늘한 바람이 분다는 소식이 많았다. 호나 리의 친구들이 감기 조심하라는 안부 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다행히 프랑스 파리는 아직까지 따뜻한 편이었다. 얼마 전까지 여행했던 프로방스보다는 아니었지만, 외출할 때 두꺼운 가디건이나 재킷을 걸칠 필요가 없었다. 저녁무렵에는 꽤 서늘해서 창문을 꼭꼭 닫아야 한다는 것만 기억한다면 최고의 날씨다.
오늘은 뭘 해먹으면 좋을까. 그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생각했다. 같이 나온 코넬리아는 시장 언저리의 공예품 상점으로 놀러가고, 그는 슬슬 좌판에서 빠질 품목인 토마토를 하나 들고 상처는 없나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노란 햇빛 덕분인지 더욱 선명한 붉은색으로 빛나는 토마토는 빛깔 만큼이나 상태도 좋았다. 토마토, 담백하지만 고소한 프로마주, 바삭한 비스킷, 신선한 양상추, 절인 올리브, 얇게 저민 햄....... 토마토를 사자고 마음 먹으니 다음 재료가 연이어 생각났다. 요리를 할 때는 메뉴를 정하고 재료는 계획적으로 사야 한다, 그의 아버지와 할머님은 그리 말했었으나 그는 요리에서는 굉장히 즉흥적이었다. 최근 코넬리아는 이 즉흥적인 메뉴선정을 조금 걱정하는 눈치지만, 적어도 영양은 제대로 따지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종이백에 신선한 재료들이 쌓여갔다. 그는 묵직한 무게로 재료가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드래곤일때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의 마을에서 나온 뒤 오랜 시간동안 그는 끼니를 사냥 혹은 마법으로 해결했다. 직접 해먹을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음식을 소환할 수 있는 편리한 힘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코넬리아가 처음 왔을 때 너무 오랜만에 요리를 한 탓인지 태워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디저트는 못하긴 했어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다행히 6개월동안 실력은 점차 나아졌고, 인간이 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문득 쇼윈도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이제는 익숙해진 녹갈색 머리. 너무 길고 거추장스러워서 얼마 전에 단발로 잘랐다. 심각한 곱슬인 탓에 뭘 해도 지저분해 보인다는 점은 같았다. 왼 뺨의 문신은 희미해졌다. 눈동자는 그대로 노란색이지만 황토색에 가까워졌다. 그는 새로운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 아쉬워.
어느새 구경을 끝마치고 돌아온 코넬리아가 쇼윈도에 비친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뭇잎 색이라서 좋았는데.
-음, 지금이 녹색 머리일 때보다 세련되어 보이잖아요?
그는 짐짓 잘난척 하면서 코넬리아에게 말했다. 코넬리아가 키득거리며 그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웃겨.
하하하. 그가 웃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다시 생각한다. 오른손에는 묵직한 종이백이 들려있다. 토마토와 햄, 프로마주의 신선함이 물씬 풍기는 갈색 종이백이다. 왼손은 금발의 사랑스러운 연인의 손을 잡고 있다. 그녀는 병을 회복하고 나서 빠르게 생기를 되찾아 키도 더 크고 뺨은 생기있는 붉은 빛이 돌았다. 푸른 눈에 어울리는 원피스. 또 새 원피스를 사주고 싶은데, 센 강변을 걸으며 그가 미소 짓는다.
빌린 아파트의 부엌에 들이치는 오후의 햇빛을 생각한다. 싱크대에 시원한 물을 가득 받아놓고, 신선한 토마토를 물에 씻고 도마 위에 올려 슬라이스한다. 햄은 얇게 저며 프라이팬에 살짝 굽는다. 비스킷 위에 햄과 토마토, 마찬가지로 슬라이스한 프로마주를 올리고, 올리브 절임과 마요네즈로 마무리한 카나페. 양상추는 씻어서 토마토와 크루통, 식초 드레싱과 버무려 샐러드로 낸다. 남은 토마토는 수프라든가, 그것도 좋겠지. 거기에 자신을 돕는 그녀의 손. 같이 요리를 하고, 저녁을 먹고, 책이나 tv를 보는 일상.
내일은 자전거를 타고 샹 드 마르스에 산책을 나갈 것이다. 느긋한 여행, 누군가가 함께 하는 여행이 로샨은 참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