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꿈왕국
Autumn Jazz Tea Party
룽크
2017. 12. 8. 00:51
티파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매드해터는 자꾸만 시계를 확인한다. 그런다고 무언가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특별히 시간이 빨리 가거나, 느리게 가지 않는다.
평소 제일 먼저 정원에서 티파티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맞이하는 매드해터지만, 요즘은 달랐다. 파티에 소홀하다는 말이 아니다. 티파티 준비야 사전에 모두 끝내두었다. 그러나 그는 공중정원에 준비된 사랑스러운 티파티 테이블에 먼저 앉아 있지 않고, 여전히 모자가게에서 모자를 봐주고 있었다. 분명 그는 세계 제일 가는 모자장인이긴 하지만, 그가 직접 가려 뽑은 직원들도 매드해터를 대신해 메종 매드니스의 이름에 걸맞는 모자를 만들 줄 알았다. 일이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그만인 것을. 귀빈과 티파티가 있는 날마저 직접 손을 보겠다며 매드해터는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직원이 와서 다른 왕자들은 이미 속속들이 도착해 공중정원으로 올라갔다고 알려준다. 매드해터는 눈을 곱게 접어 미소짓는다. 아직 일이 있어 다 끝내고 가겠다고 한다면 모두 이해해주겠지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오고 간다.
매드해터도 알았다. 모자에 장식을 다는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메종 매드니스 내 복도를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친애하는 벗들이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공중정원에 올라간 것 역시 보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복잡한 매드니스 거리에서 어디 길이라도 잃은 것은 아닐지. 매드해터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이런, 마중이라도 나가는 게 좋았을까요?
그는 그 나름의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사장님, 마지막 손님께서도 도착하셨습니다."
오늘 기분이 좋으신가봐요. 이제 모든 분이 다 오셨어요, 직원이 한 말에 그의 손이 한 순간 멈춘다.
안도도 잠시다. 다소 기계적으로 직원을 본 뒤 알았다는 미소를 지어주고서, 매드해터는 황급히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그는 대단히 신사적으로 손님에게 다음에도 꼭 다시 들러달라는 말을 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앞으로 사라지듯 떠났다.
다행히 그녀는 아직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가락을 까닥까닥, 치맛단을 두드리며 서있다. 꽤 고층까지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쉽게 내려오지 않을 것 같다. 매드해터는 그런 그녀를 잠시 응시한다. 기분이 좋아보인다는 직원의 말은 거짓이 아닌지,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띄워져 있고, 구둣발로 의미 모를 박자를 맞추고 있다. 그러다가 엘리베이터 상단의 바늘이 가리키는 층수를 보고서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중정원까지 걸어 올라갈 모양이다.
-후후, 정말이지 특이한 아가씨군요.
매드해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린다.
-공중정원은 지나치게 높으니 분명 다 걸어 올라가지는 못할테고, 중간에 엘리베이터를 타려나요? 그렇다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아가씨를 맞이하는 역도 좋겠군요. 하지만...
매드해터도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계단으로 향한다. 호기심과, 그를 향한 탐구심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발소리를 죽인 그는 그녀와 한 층하고 반 층 정도 차이가 났다. 그녀의 발걸음은 계단이라 그런지 굉장히 느렸고, 매드해터도 그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feel gaily, gladly, madly into love-"
흥얼거리는 소리가.
매드해터는 가만히 멈춰서서 입술을 제 이로 꾹 문다.
What should I call this happy madness that I feel inside of me
Some kind of wild October gladness that I never thought I'd see
What has become of all my sadness all my endless lonely sighs
Where are my sorrows now
What has become of all my sadness all my endless lonely sighs
Where are my sorrows now
What happened to the frown and is that self contented clown
Standing grinning in the mirror really me
I'd like to run through Central Park carve your initials in the bark
of every tree I pass for every one to see
I feel that I've gone back to childhood and I'm skipping through the wild wood
So excited that I don't know what to do
Standing grinning in the mirror really me
I'd like to run through Central Park carve your initials in the bark
of every tree I pass for every one to see
I feel that I've gone back to childhood and I'm skipping through the wild wood
So excited that I don't know what to do
What do I care if I'm a juvenile I smile my secret little smile
Because I know the change in me is...
재즈 향이 물씬 묻어나는 경쾌한 멜로디와 제멋대로인 박자. 어느 세계의 것일까? 매드해터는 벽에 기대 숨을 죽이고 다이나의 속삭이는 듯한 노래, 읊조리는 단어 하나하나와 숨을 고르는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쓴다.
가을에 썩 잘 어울리는 노래다. 바삭거리는 낙엽더미가 쌓인 오솔길을 걷다가, 버터빵나비가 가냘픈 날개를 떨며 날아들 듯하다.
-이런이런, 엿듣는 건 좋은 일이 아니지요...... 정말이지 이럴 때의 나는 무례하다니까요.
매드해터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노래가 귓가에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있는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이미 몇 층은 더 앞서 나가 있었다.
"후후......"
그는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풀잎 위를 굴러 땅을 적셔버리는 조그만 물방울처럼.
"참으로 사랑스러운 날이지요."
매드해터는 가장 가까운 층의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내려오는 중이었는지 엘리베이터는 금세 매드해터가 있는 플로어에 섰다.
그는 경쾌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공중정원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느릿한 움직임마저 즐겁다.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려 했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어느 층에 멈추지 않았다면 말이다.
"오호라, 아가씨가 어쩐 일로 이 층에 볼일이 있으셨을까요?"
열린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르는 그녀에게, 그는 이유를 알면서도 묻는다.
"...운동삼아 계단으로 올라왔거든요. 너무 높아서... 포기했지만."
조그만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말해주지 않는 군요, 매드해터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뜬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타, 계단을 올라오느라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창가로 돌려버린다. 엘리베이터 유리 너머로 높은 마천루들이 가득한 매드니스 거리가 보인다.
"슬슬 날이 쌀쌀하던데요. 가볍게 걷기는 좋지만."
"벌써 그런 때군요."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공중정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다이나로서는 평소에 그렇게 재잘대던 매드해터가 말이 없어 의아한 눈치였지만, 매드해터는 어깨를 으쓱해보일 뿐이다. 그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하아! 드디어 왔네, 앨리스!"
"하츠.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다이나는 앨리스가 아니라고 했지."
"아, 맞다. 미안해......!"
"흥, 어떻게 부르건 우리 마음이지냥!"
"됐고! 글쎄, 들어봐 다이나! 체셔 이녀석이 어제 우리 카지노에 와서-"
"저기 여러분... 너무 시끄러워서 도마우스가 깨겠어요!"
".......흠냐.."
공중정원에 도착하자 안 그래도 시끄러웠을 테이블이 다이나의 등장으로 더 난리법석이 되었다. 다이나는 잠깐 미간을 좁혔지만, 익숙한 듯이 의자에 앉아 그들의 가십을 받아주었다.
주최자인 매드해터도 자리에 앉았다. 따뜻하게 데워진 티팟과 마카롱, 아이싱 쿠키, 스콘 따위를 실은 트레이가 우아하게 테이블 옆으로 이동했다. 곧 알맞게 우린 홍차와 간식들이 세팅되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완벽한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매드해터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매드해터 선생님? 왜 그러세요?"
홍차를 홀짝이던 크로노가 묻는다. 캐피타도 어느 순간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묘한 얼굴이다.
"흐음..... 글쎄요?"
매드해터도 고개를 갸웃한다.
문득 다이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대고 있다. 입술 사이로 엷은 주홍색 액체가 스민다. 담담한 홍차맛이 날 저 입술이 담은 것은 뭘까?
"아하."
'무언가'를 깨달은 매드해터는 손가락을 딱, 튕긴다. 건조한 소리와 함께 휘이잉, 하고 가느다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다소 공기가 쌀쌀해지고, 공중정원의 나무들이 화려한 붉은색과 다정한 밤색으로 물든다. 스냅드래곤잠자리와 버터빵나비가 날아든다.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정원 바닥에, 테이블 위에, 사람들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슬슬 저물 준비를 하는 황금 태양빛을 받아, 높고 선명한 하늘 아래 한껏 가을에 물든 공중정원이 아름답다.
저편에서 오래된 축음기가 걸어온다. 축음기는 스스로 LP판을 긁어 멋진 재즈음악을 한참 연주하기 시작한다. LP판의 튀어나온 핀들을 다 읽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판을 뒤집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음악을 늘어놓았다.
어느 새 간식 접시에는 이파리 모양 패스츄리가 추가되었다. 매드해터는 패스츄리를 입에 가져가 한 입 씹는다. 바삭한 수십 개의 밀가루층과 설탕결정이 씹히고 혀 끝에 메이플 시럽의 단맛이 닿자,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역시 매드해터 선생님! 이번 테마도 멋져요!"
하츠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자고 있는 도마우스나, 주변 상황에 별로 관심이 없는 체셔고양이를 제외하고 다들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나는 티파티가 마음에 드는 눈치다.
매드해터는 다시 한 번 다이나를 슬쩍 살폈다.
"이 과자, 마치아 머리핀 닮았네."
"뭐어? 다이나 지금 내 머리핀을 먹고 있는 거야?"
"...이렇게 맛있는 걸 왜 머리에만 달고 다니는데?"
말을 잘못 이해한 마치아를 보고, 패스츄리를 씹던 다이나가 장난스럽게 키득였다.
"에이, 나도 맛있는 거 안다구!"
"그렇다면 나한테도 좀 나눠달라냥?"
"왜 내가 너한테 내 머리핀을 줘야하는데?"
분명 시작은 다이나가 했을 터인데, 장난에는 도통 빠지질 않는 체셔고양이 때문에 마치아 머리핀에 관한 장난이 번지고 있었다. 경쾌한 재즈 음악에 맞춰 시작된 장난은 끝이 나질 않을 듯하다.
-즐거워보여서 다행이군요.
그의 얼굴에 홍차향 만큼이나 그윽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도 초대해주셔서 고마워요, 해터."
티파티가 끝나고, 마지막까지 뒷정리를 함께 해준 다이나가 인사했다.
"중간에 정원이 그렇게 바뀌어서 놀랐어요."
"마음에 드셨나요?"
"물론이죠! 가을의 티파티는 제 로망이었으니까요."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마음에 젖어들었다.
"원래 준비한 티파티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그녀의 표정이 그리 묻고 있었다. 매드해터는 그녀의 입술을 지긋이 바라보다 의뭉스러운 웃음을 만들었다.
"오늘 아가씨가 무척 가을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랍니다."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도 부디 즐겨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는 트레이를 밀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매드해터의 답에 다이나의 얼굴에는 의문부호가 가득했지만, 곧.
"What should I call this happy madness......"
띵! 하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지만, 매드해터는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았다. 매드해터는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이나가, 안 그래도 고운 눈매를 더욱 곱게 휘며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all this unexpected joy.."
노래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매드해터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가, 평소처럼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이거야 원.
사뿐사뿐, 그녀가 곁에 다가온다. 가을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홍찻빛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곁에 선다. 그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그의 왼손을 잡는다.
손등, 그리고 손끝.
촉촉한 느낌이 와닿고, 떨어진다. 매드해터의 눈 앞에 이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갔다. 그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답례에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릿한 감각이 몰려왔다.
"정말이지 아가씨는....."
뭔가요, 해터? 다이나의 얼굴은 의문 가득한 평소의 그것이었으나, 동시에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정체모를 기묘함으로 가득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이어 하지요."
매드해터는 그녀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는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을 요량이다. 적어도 오늘 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