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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딩맛 쓰레기통
내 이름은 셸 사로테. 직업은 서기관. 사실 정말 직업삼아 하는 건 아니고 아버지의 일을 돕는 정도다. 진짜 내 직업은 사립탐정으로, 탐정이라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추리력은 그저 그런 편이다. 하지만 직접 발로 뛰어 정보를 캐내는 데는 유능하다고 자부한다. 최근 나는 사람을 찾는 의뢰를 맡았다. 코넬리아라는, 헤이디 가의 아가씨가 부탁한 것이었다. 그녀가 나와 아버지가 머무는 곳에 찾아온 것은 바로 어제. 아름다운 금발의 아가씨는 사람을 찾는다면서 아주 유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찾는 사람은 분명 그녀의 지인이지만, 이름도 모를 뿐더러 어떤 외모인지 그림이나 사진조차 남아있는 게 없었다. 설명하자면 사로테 선생님 당신과 꽤 닮았어요. 그녀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이 한 ..
20161223 창밖에는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눈 쌓인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평소에 제법 한산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사람이 많다니. 로샨은 추위로 붉어진 코끝을 장갑 낀 손으로 만지작대다, 목도리를 고쳐 둘러보다, 우산을 빙그르르 돌려 쌓인 눈을 털어보기도 한다. 벌써 연말이고, 벌써 또 다른 한 해가 오는 시점이다. 상점의 호객꾼들은 각자의 주력 상품들을 내놓고 연말을, 혹은 새해를 기념하려는 손님들을 붙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와, 시끌벅적해. 로샨은 무심하게 우산을 돌리며 미끄러지듯 거리를 통과했다. 그러면서도 광고 문구들을,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들을 꼼꼼히 눈에 담아두었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 그 아이와, 마음을 주고 받은지도 어언 500일. 기념일이라면 기념일이라 할 ..
20151009 가을로 접어드는 기간이라 다른 나라 이곳저곳에서는 싸늘한 바람이 분다는 소식이 많았다. 호나 리의 친구들이 감기 조심하라는 안부 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다행히 프랑스 파리는 아직까지 따뜻한 편이었다. 얼마 전까지 여행했던 프로방스보다는 아니었지만, 외출할 때 두꺼운 가디건이나 재킷을 걸칠 필요가 없었다. 저녁무렵에는 꽤 서늘해서 창문을 꼭꼭 닫아야 한다는 것만 기억한다면 최고의 날씨다. 오늘은 뭘 해먹으면 좋을까. 그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생각했다. 같이 나온 코넬리아는 시장 언저리의 공예품 상점으로 놀러가고, 그는 슬슬 좌판에서 빠질 품목인 토마토를 하나 들고 상처는 없나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노란 햇빛 덕분인지 더욱 선명한 붉은색으로 빛나는 토마토는 빛깔 만큼이나 상태도 좋았다. 토마..
20150818 제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어'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어떤 느낌인지, 단박에 깨닫게 되더군요. 손수 만든 과자를 대접해야지. 동화책을 끝까지 읽어주어야지. 좀 더 따뜻한 옷을 사주어야지. 불안해하는 그대 곁에 늘 있어주어야지. 왜 후회는 뒤늦게 찾아올까요. 우스운 일이죠. 아이가 섬에 오기 전부터 계속,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은.. 모두가 하고 있었을겁니다. 이 섬에 도착한 아이들은 이미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고, 얼마 남지않은 삶이나마 저희와 함께하게 되었다는 걸. 결국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나기 시작습니다. 예정된 수순.. 그저 떠날 시간이 언제인지를 모른다는 점만이 있을 뿐. 그래서인지, 정신을 차리고보니 모든 준비가 끝나있었습니다. 몸을 어떻게 움..
20150905 셸의 등에 타고 있으면 안락한 기분이 든다. 하얗고 노란 갈기는 가늘지만 튼튼한 실과 같아, 기분 좋게 얼굴을 간질인다. 바람에 그는 유연한 몸으로 유선을 그리며 날았다. 대륙은 광활하다. 대륙 위의 하늘도 마찬가지다. 셸과 나는 하늘을 나아가며, 혹은 한 자리에 머물며 대지와 하늘을 바라본다. 서늘한 새벽 공기와 저녁 놀의 공기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 장소 안에서도 이리 다양한 변화가 있으니, 그저 떠도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보았다 할 수 있을까. 세상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 아름다움에 틀림 없다. 나의 어린 드래곤 친구는 제 눈동자에 무엇을 담아내고 있을까? 감탄이 지나친 탓일까, 그는 여행을 하면서 자주 탄식하고는 했다. 나는 셸을 보면서 웃었다. 그는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아이였지만..
20150601 현자의 정원은 모두가 떠나가는 순간에도 아름다웠다. 다른 이들이 서로 작별을 하며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을 담고 있을 때도 정원은 아름답게 빛이 나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태고의 아름다움. 그것은 어떤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제 혼자서 기나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이 만남은 정말 스쳐가는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막의 색을 가진 엘프는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괜찮으신가요, 아버지.] 숲을 닮은 용은 제 부모노릇을 해준 엘프에게 물었다. 물었다기 보다는, 단순한 위로의 표시였다. "음..... 또 언제 이런 푸른색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있어요." 눈을 감고 엘프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엘프이되 자연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엘프는 최대한 많은 기운을..